멈춰서고 들여다보게 되는 도심 속 식물

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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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단지에서 식물을 구조한다고? 이렇게 멋진 활동이 있었단 말인가!! 감탄하며 열었던 <체험! 삶의 식물 : 도심 속 식물 친구 만나기>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알면 보인다'는 간단한 문장을 온 몸으로 체험하게 된 시간이었는데요. 어떤 내용의 활동이었는지 슬로님의 글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을거에요! 😆


식물을 주제로 해서 만나는 모임은 매번 즐겁다. 모임에는 내공이 굉장한 식물 전문가도 있고, 처음 화분을 사보고 고민을 하는 이도 있고, 어쩌다 보니 식물이 집에 들어와서 두루두루 살고 있는 자도 있다. 나 또한 ‘어쩌다 식집사’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하나씩 들여오게 된 것을 시작으로, 이젠 한 구석을 식물존으로 구성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밥솥과 전기포트는 옆으로 쫓겨났지만 그래도 역시 포기할 수는 없다.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 식물 모임 프로그램이 있다 하여 재빠르게 신청버튼을 눌렀다. ‘도심 속 식물 친구 만나기’라는 이름이 좋았고, 재개발 단지에서 식물을 구한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떠오르는 게 있어서 검색을 해봤더니, 역시 ‘공덕동 식물 유치원’의 백수혜 작가님이 진행을 맡았다. SNS를 통해 책을 알게 되면서, 이 활동도 듣게 되었고 ‘재개발 단지에서 식물을 구하는 일’에 대한 시선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관점이어서 궁금하던 차였다. 이 기회에 작가님 이야기도 듣고, 함께 좋은 시간을 쌓고 싶었다.





1회차, 비가 꽤 쏟아지던 날 첫 모임이 진행되었다. 이름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으니 탐이 날 정도로 귀여운 이름표가 보였다. 그리고 자리에는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 마련한 작은 간식이 있었고, 작가님의 책, 미니 가드닝 도구가 놓여 있었다. 책까지 마련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포장까지 해주셔서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자료를 확인할 모니터를 기준으로 둥그렇게 앉은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모임도 역시 식물에 관심이 들기 시작해서 방문한 사람, 마당까지 가꿀 정도로 탁월한 전문가인 사람이 한 데 모여있었다. 나는 나의 식물 라이프를 일단 키우는 사람으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라는 원칙 하에 키우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식물’하면 ‘정성’이라는 키워드도 따라붙기 마련인데, 나는 그러하지 못하다. 충분한 햇볕과 바람이 없는 이 작은 자취방에선 어디서든 잘 자라는 식물이 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짧은 자기소개 후 본격적으로 도심 속 식물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님이 소개해주시는 도심 속 식물들의 세상은 내가 평소 동네 산책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넓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꽃을 피웠을 때 눈길을 주었지, 잎을 들여다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사진을 보면서 추측도 해보고, 계속 어떤 것인지 질문을 하면서 새로운 것을 배웠다. 다음 모임이 더 기대되던 하루였다.

 

2회차, 동작구 흑석동 재개발 단지에서 두 번째 모임을 진행했다. 2회차 모임이 시작되기 전 종종 지나가다 본 식물 사진을 찍고 공유하는 일이 있었다. 알고 나면 지나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렇게 멈춰서고 발견하는 일들은 일상의 반짝이는 조각을 모으는 것 같다. 하나의 길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들여다보는 일도 때로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재개발 단지에 들어선 순간 공기가 달라진 기분을 느꼈다. 분명히 이곳도 대화가 오가고 안부가 있었을 텐데, 사람이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생기를 잃을 수가 있구나. 건물의 완성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구나 싶었다. 부서진 자재들이 여기저기 놓여있었고, 벽에는 가스 여부가 낙서처럼 칠해져 있었다.



우리는 그 사이를 걸으며 식물을 발견해냈다. 어느 집에서는 오래된 포도나무 덩굴이, 커다란 감나무 그리고 밤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주 오랜 세월 머물렀을 텐데, 재개발이 시작되면 모두 베어진다는 이야기에 모두 안타까워했다.



이 길에는 여기저기 놓여진 길고양이 밥그릇과 매섭게 다투는 비둘기가 공존했다. 걷다가 누군가 내놓은 그릇 컵등을 찾았고, 벽에 그려진 그림을 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개망초와 까무중 등을 보았고, 향을 내는 식물도 보았다. 즉석에서 모야모로 식물 이름을 찾는 일도 했다.

 

어떤 식물을 구조해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길 끝에서 전봇대 근처에 무더기로 자라난 사랑초를 발견했다. 우리는 다함께 사랑초를 구하기로 결정했다. 삽으로 살살 뿌리를 캐냈더니 작은 당근 같은 친구가 튀어나왔다. 사랑초는 구근 식물이기 때문에 이렇게 두꺼운 뿌리가 있다고 한다. 어쩌다 사랑초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추측으로는 화분 거름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랑초를 키우다가 죽었다고 착각해서 버리지 않았을까 싶다는 결론을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초는 이곳에 뿌리를 내렸고, 자리를 잡아 자라난 것이다. 그 의지를 이어받는 느낌으로 모두가 한 곳에서 발견한 식물을 나눠가졌다. 사랑초는 이제 각자의 집에서 자라날 것이다.




3회차 식물 유치원 졸업식 날. 작가님의 작업실에 모여 키운 식물을 졸업시키는 하루를 보냈다. 작가님 작업실 위치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있어서 한참을 헤메이다가 들어갔던 것이 떠오른다. EBS 지식채널e 팀도 촬영차 같이 있어 더 특별했던 하루이기도 하다.




테이블 위에는 작가님이 구해낸 수많은 식물들이 놓여있었다. 채송화와 꽃기린, 섬초롱꽃 등 식물 설명을 들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쪽에는 방명록이 있었고, 데려갈 친구의 이름과 정보를 적을 이름표도 마련되어 있었다. 모두가 어떤 식물을 데려가볼까 고민을 했다. 식물을 키우다보면 또 나누는 것이 매력인지라, 그 풍경이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특히 이 친구들은 버려지고 사라질 뻔한 사연이 있다는 점이 더 매력적이고 말이다.



작업실에 놓인 여러 식물 관련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세밀화로 그려진 것도 있었고, 그래픽으로 제작된 아트북도 있었다. 세상에 이런 식물이? 이런 마음으로 책을 돌려보며 시간을 보냈고, 매니저님이 사주신 케이크를 나눠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식물 구조 후 함께 만들게 된 포토카드가 있어서, 돌아와 사랑초 옆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사랑초를 보면서 ‘구근식물’이라는 특징이 가장 마음에 남았다. 사랑을 닮은 잎과 꽃을 피워내기 위해 그 아래에는 단단한 뿌리가 있다는 사실이 자꾸 맴돌았다. 죽어서 버려진 줄 알았던 사랑초도 여기서부터 다시 자랐을 것이다. 사랑초에게는 보다 단단한 뿌리가 있다고, 스러져도 이 중심에서부터 다시 자라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사랑이라는 이름만큼 잘 맞는 게 또 어디 있을까 싶다. 2회차 후에 갑작스럽게 수술을 하게 되어서 식물을 구하고도 잘 돌보지 못했었는데, 이 친구는 어떻게 잘 살아남아서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이다. 건강을 회복하기까지 마음이 지쳤었는데, 포토카드를 받고 다시 의미를 되새겨보니 마음을 다잡게 된다. 언제든 다시 피어나기를 바라며 오래 함께 했으면 좋겠다.

 

4회차, 사화정원을 만드는 날. 다시 한 번 작가님 작업실에 모였다. 분명 한 번 와봤다고 지도도 보지 않고 당차게 걸어왔는데, 옆 계단에 한 번 올랐다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갔다가 하며 헤매버렸다. 그렇게 장소에 도착했는데 웬걸 모두가 같은 경험을 해서 재밌었던 에피소드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만의 작은 정원을 만드는 클래스를 진행했다. 유리볼을 준비해주시긴 했지만, 자취방 특성과 나의 맥시멀리스트 특성이 한 몫 하여 둘 곳이 없을 것 같아 나는 개인적으로 작은 유리병을 준비해갔다. 모래와 이끼, 꾸밀만한 프리저브드 꽃과 가지, 바다유리, 미니 전복껍질 등 다양한 용품들이 자리를 가득 채웠다.



나는 하나의 유리병은 봄, 여름 테마로 다른 하나의 유리병은 가을, 겨울의 테마로 정원을 꾸몄다. 꾸밀 때 쓸까 싶었던 짱아 피규어를 두고 삿갓조개를 머리에 씌워주기도 했다. 한 번 꾸미기 시작하니 심혈을 기울이게 되고, 더 잘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같은 재료를 활용했는데 다 각기 다른 디자인이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정원을 소개하고 사진도 찍고, 빵을 나눠먹으며 소소한 후기를 나누었다. 분명한 것은 모을 통해 세상을 더 많이 들여다보게 되고, 집은 더 풍요로워 졌다는 것이다. 다음에 다시 식물을 매개로 만나는 날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때는 나도 나누는 사람이 되어있기를 희망해본다.




슬로

조급한 마음을 다잡고자 '슬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산책을 좋아하고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조금씩, 꾸준히 나만의 속도를 찾아 노력중입니다.